라이프로그


2013/01/14 21:56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심보선









photo by 꿈소 & 다락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심보선


우리에게 그 어떤 명예가 남았는가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몇 개가 남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주말의 동물원은 문전성시
야광처럼 빛나던 코끼리와
낙타의 더딘 행진과
시간의 빠른 진행
팔 끝에 주먹이라는 결실이 맺히던
뇌성벽력처럼 터지던 잔기침의 시절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곁눈질로 서로의 반쪽을 탐하던
꽃그늘에 연모지정을 절이던
바보, 라 부르면
바보, 라 화답하던 때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소리 내어 웃어 보시게
입천장에 박힌 황금빛 뿔을 쑥 뽑아보시게
그것은 오랜 침묵이 만든 두번째 혀
그러니 잘 아시겠지
그 웃음, 소리는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는 걸
우리는 썩은 시간의 아들 딸 들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죄다 풀리고야 말았다



덧, 2012년의 마지막 달, 강화도, 이름없는 모임의 1박 2일 야유회. 서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고장에서 제 각각 사춘기를 앓던 무명의 소년과 소녀가 만나 부부가 되었다. 낯설기 그지 없는 아내라는 이름. 낯설기 그지 없는 남편이라는 이름.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어색해할 날이 오겠지. 심보선의 시를 닳도록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 시는 이토록 새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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